우리는 스코필드란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을 석호필이라 부릅니다.
3.1 운동을 세상에 알린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그리고 잘 알려진 프리즌 브레이크 주인공 마이클 스코필드 입니다.
주인공 마이클 스코필드는 많은 분들이 알고 있으나,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는 모르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마이클 스코필드역을 맡은 웬트워스 밀러는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 각본을 집필한 작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국가 보훈처>
오늘은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 볼까 합니다.
스코필드를 발음하다 보면 석호필과 비슷하여서도 있지만 그 외 이유도 있습니다.
국가 보훈처에서는 3.1운동의 산증인인 스코필드 박사를 2016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
1889년 영궁에서 태어난 스코필드 박사는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세균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부인과 함께 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으로 와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을 가르쳤습니다.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인을 사랑한 그는 한국어도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스코필드를 발음하다 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석호필' 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스코필드의 한국어 선생이자 통역사인 목원홍과 함께
스코필드는 한국 이름인 ‘석호필(石虎弼)’을 좋아하고 즐겨 사용했다. 그 발음이 스코필드와 비슷할 뿐 아니라 철석같은 굳은 의지를 나타내는 ‘돌 석(石)’, 강자에게는 호랑이 같이 무서운 사람임을 나타내는 ‘호랑이 호(虎)’,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도울 필(弼)’의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코필드의 한국 이름이 그의 인격과 삶을 대변해 준다.<국가 보훈처>
1919년 3.1운동 시작 전 이갑성씨는 독립운동 하는 모습을 찍어 알려 줄 것을 당부하였고, 그는 3.1 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세상에 알려 준 분입니다.
또한, 일본군이 제암리에 살고 있는 이들을 제암리교회에 가두어 놓고 만행을 저지른 제암리 학살 사건도 세상에 알려습니다.
그는 유관순 등 투옥된 독립 운동가에 대한 고문과 비인도적인 만행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한때는 한국을 돕는다는 이유로 강제 출국당하기도 하였으나 다시 한국으로 와서 여생을 마쳤습니다.
3.1운동을 세상에 알린 공적으로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린 프랭크 윌리엄스코필드 박사는 외국인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석호필이라 불리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는 1960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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